2012년 7월 4일 수요일
코어링(Coring)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시작하라.
몰입과 핵심 그리고 행동에 대해서 논할 때 그 논의가 깊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상상하게 된다. 물론 큰 그림을 그리고 대단한 것을 논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꿈이 커야 결과도 크다는 것에 필자도 일부 동의한다. 하지만 굳이 필자의 이론을 코어라고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는 집중과 핵심 그리고 깨달음의 느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세밀한 것이다. 그렇다고 숫자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런 세심함도 아니다. 우리가 소위 쫌생원이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쫌생원은 작은 것에 목숨을 거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소탐대실이 바로 쫌생원의 전공이다. 필자가 말하는 코어는 쫌생원이 아니라 무언가 마음을 정했다면 그것을 흔들리지 말고 유지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겉치장이 아닌 핵심에 머물라는 것이다.
핵심에 머물기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볼 때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 드릴 다운(Drill Down) 기법을 사용하여 그 사물의 핵심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 사물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안다는 것을 넘어서 그 핵심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를 그야말로 느껴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자 현대 사회의 복잡한 첨단 기술이나 각종 경영과 관련된 지표들에서 벗어나 음악을 한번 생각해 보자. 아마 세상 어떤 사람도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인생의 30%를 음악으로 채우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늘 음악을 곁에 두고 싶어 하고 음악이 있으면 즐겁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자와 비슷할 것이다. 각자 좋아하는 장르는 다르지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에는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집중해 보았을까?
한번 회상해 보자. 학교 다니던 10대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좋아하는 가요나 팝송을 들어본 경험은 모두가 있었을 것이고, 그 노래들 중에 반복 재생을 통해 50번쯤 연속으로 들었던 노래(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카세트테이프(보통 한 면의 재생 시간이 30분)라는 것을 이용해 음악을 들었는데, 번복 재생 기능이 없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 전체에 반복적으로 녹음하여 들었던 재미있는 기억도 있다)도 한 두 곡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음악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 것인지? 또는 그 음악에 사용된 악기가 어떤 종류들의 것이지? 그 음악을 작사하고 작곡한 사람들은 누구인지? 심지어 그 음악의 가사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많은 정보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반드시 알아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옳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왜 내가 이렇게 이러한 것을 좋아하는지 자세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심지어 인간은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자세히 알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다시 강조 하건데 인생에 적어도 자신이 관심이 있어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그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이야기하는 집중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집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심지어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라고 한다)는 학과 공부에 몰입해야 하고,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는 취직을 위해서 어학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취직이 되어서는 경쟁에 이기기 위한 싸움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 한 가지 일에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 보다 넓게 겉만 확인하고 빨리 그것이 무엇인지를 답하는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지능이 좋게 태어난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빨리 무언가의 사실이나 현상을 파악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파악된 지식들이 과연 진정한 사실일까?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정말 그 사물과 관련된 핵심일까? 그리고 그가 그렇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일까? 이것들은 좀 더 따져 봐야 할 문제들이다.
사실을 안다는 것과 느낀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어떠한 것에 대한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깨달음의 단계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는 자신의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지식이 과연 왜 필요한 것일까?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단 하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시간이라는 개념 밖에 없다. 물론 이 시간이라는 것도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 어딘가로 가면 지구에서의 시간 개념이 아닌 다른 개념이 존재할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필자가 주장하는 시간의 개념은 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스티브 잡스에게 주어진 지구상의 하루 24시간과 나에게 주어진 24시간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외에 모든 것은 불공평하다. 각자 태어난 배경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
그렇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보여지는 부분에 대해서만 불평등의 시각으로 세상을 평가한다.
‘나는 가난한집에서 태어나 그나마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위치에 있지만, 지금 내 삶은 사회적 무게에 짓눌려서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평가 말이다. 아마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90% 이상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특히 발달되고 화려해 보이는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이러한 자격지심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동경하는 삶은 화려하게 고급 아파트에서 잠을 잘 수 있고, 멋진 옷과 구두를 신고 다닐 수 있으며,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 우는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값비싼 자동차를 운전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한번 다시 생각해 보자.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들일까? 이런 것들이 지속되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여기서도 우리는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삶에 빠져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진부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 앞에서 언급한 내용 중 한 가지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가 이야기하는 것에 동감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표현한 동경하는 삶의 핵심은 결국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내 삶이 편안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진부한 이야기지만 거짓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핵심에 집중해야 한다.
즉, 세상은 변한다. 과연 10년 후에도 내가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할까? 내가 지금 부러워하고 있는 명품 가방을 소유했다고 가정한다면, 10년 후에도 나에게 소중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과연 10년 후에도 지금 내가 그렇게 타고 싶어하는 자동차가 내 삶에 있어서 그 값어치를 유지하고 있을까? 답은 자명하게 ‘그렇지 않다’일 것이다.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추구하는 핵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즉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내 삶이 편안해 지는 것’ 이 핵심 논리는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삶은 어때야 할까? 생각해 볼 중요한 문제다. 당장 눈으로 보이는 것은 껍데기일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필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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